출처: http://mcmc.tistory.com/2 [민창이 블로그]

*상윤준영

*슈레이

*동거하는 두 사람

*아무 내용이 없습니다. 밥만 먹어요.







"사치 부리고 싶어요."


따뜻하게 난방을 뗀 바닥에서 담요를 두른 채 고양이마냥 데굴데굴 구르던 준영이 외쳤다. 소파에서 오랜만에 홈즈를 독파하던 상윤은 눈치를 보며 눈을 반바퀴 굴렸다. 사치라. 상윤과 준영의 벌이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소비재는 사치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떠오른 게 그런 것뿐이라, 상윤은 시계 보러 갈까 하고 입을 열었다. 마침 연말이니 새로 하나 사주고 싶었다. 구두도 수트에 맞춰 입는 포멀한 디자인은 많았지만, 평상복에 어울리는 밝은색은 없었다. 준영의 신발장을 떠올리며 카멜 브라운으로 사줘야지, 생각하니 썩 좋은 제안 같았다. 준영이 어쩜 이렇게 낭만이 없을까 탄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렇게 추울 때 따뜻한 집에서 부리는 사치가 뭐겠어요?"

"…. 벗을까?"

"아, 좀!"


반쯤 농담삼아 말했더니 준영이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쯤은 진담이었기에 끝나지 않는 웃음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것도 아냐? 그가 흰 손가락으로 준영의 뺨을 초조하게 간질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먹는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꿀맛인데. 전기장판과 차가운 음식은 찰떡궁합이라고요?"

"난방을 낮추면 안 돼?"

"그럼 사치가 아니잖아요."


준영이 그를 나무랐다. 안타깝게도 멍청하구나, 하는 투로. 몸을 일으켜 상윤의 무릎에 얼굴을 괸다. 고양이처럼 느릿하게 허리를 폈다.


"달걀도 있고, 멸치도 있고, 표고도 있고, 동치미도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게 없네."

"냉면?"

"딩동댕. 소면밖에 없어요. 이 계절에 냉면용 메밀면을 사려면 마트 가야 되는데. 추워서 나가기 싫네요."


히잉. 준영이 귀여운 소리를 내며 상윤의 다리 사이로 몸을 기댔다. 무척 먹고 싶은 모양이지. 무르팍에 흩어진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아쉬운 마음에 하나하나 떼어내고, 상윤이 몸을 일으켰다.


"메밀면만 사 오면 돼?"

"형이 최고야!"


겉옷을 입고 차 열쇠를 챙겼다. 나가려는 그 뒤로 준영이 쫓아와 뺨에 입 맞췄다. '저리 비켜, 이상윤!' '제가 죽일 겁니다. 이상윤.'에서 '형이 최고야!'까지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는가. 닫히는 문 사이로 손 흔드는 연인을 보며 새삼 행복을 느꼈다.


상윤을 배웅하고 준영도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종이에 잘 싸둔 다시마를 꺼내서 키친 타월로 깨끗이 닦고, 말린 표고버섯과 멸치를 찬 물에 가볍게 헹궈 국물용 냄비에 넣었다. 면 삶을 냄비도 따로 꺼내 놓고서 고명으로 고기를 삶을까 지단으로 대신할까 고민했다. 마트까지 30분이면 갔다 오겠다는 생각에 대충 지단으로 때우기로 했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흰자를 먼저 얇게 부치고 도마 위에 돌돌 말아 썰어냈다. 밸런스를 생각해서 실고추도 좀 썰었다. 다음은 양념장이었다. 고춧가루에 고추장 조금, 간장, 마늘 약간에 식초랑 설탕, 소금도 조금씩. 잘 섞어 맛을 볼 때 육수가 끓었다. 불을 낮추고 뚜껑을 열어 다시마만 건져 냈다. 한소끔 더 끓이고 식히기 위해 냉장고에 넣었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영 무소식인 상윤을 걱정하면서, 준영은 다시 담요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준영아 큰일 났어.”


겨울바람과 함께 사건을 몰고 왔나 보다. 상윤이 눈썹을 모으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면 하나만 사오라고 보내놨더니 뭘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커다란 종이 가방에선 매캐한 탄 냄새와 함께 익숙한 달콤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군고구마?”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상윤이 변명을 시작했다. 저 아래 장사하는 트럭이 있길래 군고구마를 4개 샀단다. 네. 준영이 끄덕여줬다. 드럼통을 개조한 군고구마 기계가 신기해서 처음 본다고 하자, 군고구마 장수가 하나 더 주더란다. 그랬군요. 옆에서 마찬가지로 군고구마를 사던 어떤 부인이, 이걸 왜 처음 보냐 여기 사람이 아니냐 묻길래, 미국에서 왔다 하니 그 부인이 자기 걸 꺼내서 하나 더 얹어주더란다. 네에. 군고구마 장수가 놀러 왔느냐기에 애인을 만나러 왔다 하니, 나눠 먹으라고 두 개를 더 줬다고. 그렇게 이상윤은 군고구마 부자가 된 것이었다.


“첫째, 남이 준 걸 덥석 받아오지 마세요. 둘째, 신상 정보를 마구 흘리다니 제정신인가요? 셋째, 네 개만 꺼내서 접시에 올려놓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요. 마지막으로, 웃기고 귀여우니 이번만 봐 줄게요.”

“응.”

“면도 삶아놔요.”


빨개진 코가 가여워서 목도리와 겉옷을 벗겨주자 상윤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손을 씻는 물소리가 들리고 냄비에 물을 채우는지 스테인리스에 물이 떨어지는 빗소리가 났다. 면이 다 삶길 때쯤 준영도 주방에 가 만두를 노릇하게 구웠다. 원래 냉면은 만두랑 먹는 거랍니다, 덧붙이면서.


그가 잘 삶아낸 냉면을 그릇에 소담하게 담아냈다. 그 위로 나박하게 썬 무와 고명을 얹고 동치미 국물과 미리 식혀둔 육수를 섞어서 끼얹었다. 마지막으로 양념장도 얹어냈다. 그날은 식탁이 아닌 소파 테이블에 저녁이 올라왔다. 러그가 깔린 바닥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중국계 친구한테 배웠다며 상윤이 식초와 라유를 섞었을 땐 의아했는데, 만두를 찍어보니 맛이 좋았다. 준영이 군만두를 먼저 먹고 있을 때, 상윤은 양념장과 고명이 올라간 냉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 먹고 뭐 해요?”

“으응. 내가 먹었던 물냉면에는 양념이 없었던 거 같아서.”

“이상윤. 여기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배후 세력이 있습니다. 물냉면은 평양식인가 진주식인가 하는.”

“그렇군.”

“진지하게 듣지 말아요.”


준영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냉혈한에 건방지기만 한 줄 알았던 남자는 알면 알수록 귀여워서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했다.


“뭐, 서울에서만 지냈으니 평양식만 먹어봤겠죠. 전 부산에 있던 적이 있어서 냉면은 거기식이 익어요.”

“고향은 아니잖아.”


준영의 억양에서 사투리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예전, 적대 관계일 때 조사해 본 바로도 준영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울이었다. 아아, 이해한 준영이 설명했다.


“이 나라 불법 총기는 다 부산항으로 들어와요. 한 넉 달은 아예 거기 살고, 몇 개월 계속 출장도 갔었죠. 돼지국밥이랑 밀면 말아먹으면서 거기 브로커들이랑 친해지고. 뭐, 그랬어요.”

“다 잡았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준영이 과거의 어떤 때처럼 웃었다. 우아하고, 속을 알 수 없고, 젊은이 같기도 노인 같기도 한 그 이상한 웃음이었다. 상윤은 그 웃음이 아주 싫었다. 이십대 어린애가 짓기에는 지나치게 때 묻은 웃음이어서.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그때는 자신도 갓 서른이 된 애송이였기 때문에. 그 감정이 안타까움과 연민과, 애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무척 오래 걸렸다.


만두를 집어다 입에 넣어주었다. 웃음을 거두고 준영이 오물오물 받아먹었다. 후식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만두도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나란히 이를 닦았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자기에는 이르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늦어버린 시간이었다. 상윤이 벌써 이런 시간이군, 아쉬워했다. 아직 코스가 하나 남았다는 준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이 처음에 말한 사치, 해야죠?”

“그렇군.”

“아, 잠깐. 대뜸 손부터 넣지 말라고, 이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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