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mcmc.tistory.com/2 [민창이 블로그]
*상윤준영
*연령조작. 준영이가 연상입니다.
*안하무인 이상윤이




첫 만남부터 마음에 안드는 녀석이었다. 다짜고짜 안경을 벗겨가는 무례함이라니. 강준영에게 그따위로 군 인간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그녀석 뿐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어린 놈. 대충 걸쳐입은 셔츠나 맨투맨에 블랙진, 지겹지도 않은지 사시사철 신는 것 같은 데저트 슈즈. 검은 비니. 주머니에 필기구 몇 개와 지갑, 교재는 대충 손에 들고 때로는 아예 없기까지. 슬렁슬렁 커다란 늑대가 제 영역을 산책하듯 캠퍼스를 누비는 모습이라니. 질색이었다. 준영은 그런 충동적이고 성마른 성향의 사람이 맞지 않기도 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상윤은 최악이라 할만 했다.

통계과 수석이라더니 거기 녀석들은 다 멍텅구리인가보지. 국립대 통계과 학생 무더기를 바보로 만든 외교 수석 강준영이 그 어린 놈에게 한 번 손을 탄 안경을 벗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와, 진짜 잘생겼다. 나 이런 말 잘 안하는데. 이거 도수도 없네. 왜 가리고 다녀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깐 방심한 사이, 그래 솔직히 말하자. 잠깐 졸았는데 귀에 걸린 안경이 빠르게 빠지는 느낌에 눈을 떴을 때 였다. 살짝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올리브색 눈동자를 가진 앳되어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한 손에는 준영의 은테 안경을 든 채였다. 준영을 서서 내려다 보는 얼굴은 제법 준수했다. 청년기에 맞닿은 소년시대의 모서리가 가로수 꽃그림자 사이사이로 눈부시게 빛났다. 미끄러지는 안경을 잡아준 건가 싶은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냥 벗기고 싶었던 거다. 심록의 나뭇잎 그림자 밑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거늘.

"난 그런 말 너무 많이 들어 봤는데. 그쪽처럼 귀찮게 구는 게 한둘이 아니라서. 가리고 다녀야  하거든. 돌려주시죠."
"싫은데."

그 장난스러운 웃음이 제법 그럴 듯 하긴 했다. 그래서 강준영이 어떻게 했느냐. 정강이를 발로 차버리고 안경을 돌려받았다. 다른 말로는 실력행사로 탈환했다고 한다.

조용히 졸업하고 싶은 강준영의 바람과 다르게 오후 강의부터 그 어린 놈은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자신도 함께. 신입생대표가 그 준영 선배에게 집적대다 까였다더라. 본의 아니게 주목받는 스스로를 망각한 탓이었지만 놈의 잘못이 가장 컸다. 녀석이 지나다니는 길목길목마다 힘내라는 성원이 따라다녔다.  어린 놈은 왼손을 들어 여유롭게 감사를 표하고 다녔다. 씨발새끼.

왜 이런 의미 없는 회상을 하느냐. 문제의 인물이 저쪽 맞은편 문에서 유유히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학기에 잘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고 미국으로 유학 가버린 화제의 인물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강준영은 조용히 졸업하고 싶었다. 녀석이 무사 졸업으로 달려가는 분기점에 버티고 선 느낌이었다. 그때 안경을 돌려 받는 대신 그냥 무시하고 자리를 떴어야했다.

손가락에 걸고있던 안경을 다시 고쳐쓰고 보던 노트에 집중했다. 준영은 곧 외무고시와 졸업을
동시에 앞두고 있었다. 도서관이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에 휩싸여도 침착하게 할 일을 했다. 집중하자,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암기를 시작하는데 노트 귀퉁이에 불쑥 손이 들어왔다. 하얗고 마디가 불거진 손이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 때문에 바짝 깎은 손톱과 뼈의 윤곽만으로도 누군지 아는 자신이 준영은 싫었다. 손가락이 노크하듯 그 위에서 몇번 춤을 췄다.

무시했다.

다시 어울려 줄까보냐. 머릿속에서 참을 인을 열 번 그리면서 평정을 가장했다. 한 번도 참가해 본 적 없는 학교 축제 때 녀석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을 했다. 농활에도 끌려갔다. 초연해 보이는 얼굴로 어딜 그렇게 활발하게 쏘다니는지. 말려든 게 열 손가락 발가락 다 해도 모자랐다. 다시는. 다시는!

노트를 계속 들어다보자 상윤이 연필 하나를 들고 글자를 썼다.

'형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준영의 대학생활은 단조로웠다. 강의실, 벤치, 아니면 도서관이었다. 너만 아는 게 아니란다 어린 새끼야.

계속 무시했다. 흰 손이 포기한 듯 시야에서 빠져나갔다. 유쾌해졌다. 언제까지 봐 줄 지 알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안아줄 거예요?"

미친 자여! 네 이름은 이상윤이어라. 조용해야할 도서관에 그의 목소리가 당돌하게 울렸다. 준영이 못 이겨 고개를 들자 주위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공부하던 이들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구경은 재밌어도 미친 짓거리에 말려들긴 싫은 것이리라. 알면 나도 좀 도와달라고! 학기가 막 끝난 터라 사람이 애초에 적었던게 불행 중 다행은 무슨. 상윤이 뻔뻔한 낯으로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준영의 연필을 들고.

"너 이자식..."
"밥은 잘 먹고 다녔어요? 나 없다고 굶었나 왜 마른 것 같지... 불쌍하게."

상윤이 준영의 미끈한 뺨을 쓸었다.

"좀 꺼져."
"뒷문 쪽 생선정식 하는 식당 오늘 갈치 구이래요. 제가 다 발라줄게요, 형."
"야! 가자."
"응."

준영이 시원하게 노트를 접고 일어났다. 그가 내팽개친 가방을 정리해 어깨에 맨 상윤이 그 뒤를 따랐다.

영국에서 오래 살았다면서, 상윤은 젓가락질을 잘했다. 특히 생선을 무척 잘 발랐다. 비싸고 발라먹기 힘들어 버리는 부분이 많은 갈치도 살뜰히 발라 잘 지은 백반 위에 올리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생선, 그 중에서도 갈치를 특히 좋아하지만 혼자 먹기에 영 시원찮은 것을 상윤은 시원하게 해결해주었다. 준영이 기본 찬을 먹는 사이 발라내는 방식으로. 잘 바르지 못하는 모양새를 나무라지도 않고 '아, 저 생선 바르는 거 좋아해서요. 새 젓가락이니까 깨끗해요, 형'하고.

이번에도 그랬다. 달라진 점이라면 준영의 몫으로 나온 생선 접시를 처음부터 상윤의 앞으로 밀어놓았다는 것이다.

"나 없어서 생선도 못 먹고 어떡해요."

그게 좀 아쉽긴 했다. 이상윤은 모르는 생선이 없는지 뭐가 나와도 뼈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림처럼 발라냈다. 그렇지만. 준영은 입을 다물고 숟가락에 흰 쌀밥을 가득 올렸다. 상윤이 잘 바른 갈치 살을 올려주었다.

상윤이 먹는 둥 마는 둥 반쯤 비운 밥그릇도 빼앗아 먹고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커피를 쪽쪽 빨았다. 담벼락이 노을에 빨갛게 물들었다. 준영의 몸에도 온통 빨강이 번졌다. 오늘 공부는 글렀으니 이 길로 집에 갈 생각이었다. 뒤에 달린 생체 짐덩어리가 좀 거슬렸다.

"형 저 라면 끓여주면 안돼요?"
"아까 밥이나 먹지 그랬어."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이제 와서 친구라도 하자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자퇴한다는 것도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것도 거기 대학에 이미 붙었다는 것도 다. 그렇게 끌려다녔는데. 같이 있었는데. 즐겁다고, 소중하다고 생각한 건 이쪽 뿐이었다니. 역시나 마음에 안드는 녀석이었다.

몇 마디 더 쏘아 줄 생각으로 뒤돌아봤다. 상윤이 굉장히 분한 표정으로 준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만 우리 관계를 친구라고 해. 오직 당신만. 그래서 그랬어."

맞는 말이었다. 준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어차피 이제 졸업이잖아요. 형도 없는데 여기 다녀서 뭐 해요."

상윤이 불퉁하게 뱉은 말은 준영의 발 밑에서 보석처럼 굴렀다. 이걸 주워, 말아?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저그런 돌맹이가 아니었다. 분하긴 했다. 그래도 둘 다 한국에 있는 편이 만나긴 쉬울 게 아닌가. 충동적이고 성마른 어린애 같으니라고.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준영이었다. 이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그럼,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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