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아무/인포]불과 물이 만나는 곳
사양안내
1. 사이즈: A5
2. 페이지: 126page(공포 80779자/편집상의 공백 미포함)
3. 행사: 디페스타 2017. 12. 09
4. 성인본
본편안내
웹재록본에 추가분을 더한 책입니다. 아카아무 아카후루 라이버번 등이 섞여 있습니다.
분량이 추가된 엽편과 가필 수정만 거친 글들이 있습니다.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추가)
2. 품속에 쏟아지는 우주
3. 여명의 눈
4. 더치라떼, 슈가 프리로
5. 안녕, 레이 군(추가)
6. 불과 물이 만나는 곳
7. 불을 지펴라
8. 죽음 앞에 앉아있던 그들에게 주어진 사사롭고 쓸모없는 세상을 구하는 방법(추가)
9. 우주 하이재킹(추가)
10.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미공개 엽편)
11. 앞과 뒤(미공개 엽편)
<우주 하이재킹>
과열된 엔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애초에 냉각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배출 코크에서 냉각수가 조금씩 흐르던 고철로 무로흐르비비-6 성단을 돌파해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무로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보닛에 급속 냉각 질소를 퍼부었다.
그가 엔진 상태를 살피는 동안 이미 가망 없다는 판단을 내린 아카이가 스페이스카 뒷자석에서 짐을 꺼내고 있었다. 흐음, 아쉬움을 흘린 아무로가 그가 건네는 짐을 받아 메었다. 두 사람은 우주 공간수송 고속도로에서 차를 떨어트리기 위해 바깥쪽으로 차를 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아래에서 나오는 평행조절장치가 도로상의 온도, 습도, 기압, 중력 등을 조절해 주고 있어 도로 위는 안정된 행성과 비슷한 환경으로 유지되었지만 도로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낭떠러지 같은 우주 공간이었다.
몇십 년 전에는 튜브 형태로 건설되었지만 중력 조정으로 대기 질을 조정하는 기술이 발명되면서 미개척의 상징인 우주 대기와 개척의 상징이었던 투명한 차단막은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도로에서 이탈하면 십중팔구 우주 미아가 되므로, 이탈하지 않기 위한 장치 또한 존재했다. 손목에 차는 형태의 우주 고속도로 패스와 모든 차체에 법적으로 설치된 안전장치였다. 고속도로 외곽의 센서가 접촉을 인식하면 차단 막이 가동됐다. 그 막은 물컹물컹하고 질긴 묵과 비슷한 재질로 되어있어 잘 늘어나고 끊기지 않아, 사고가 나도 끈끈이 거미줄처럼 차체를 고정했다. 말이 안전장치이지 반응 미립자를 차체에 골고루 바르는 형태여서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도로 외곽까지 차체를 밀자, 아무로가 갓길에 있는 안전 신호등 아래를 작게 도려내 무언가를 조작했다. 오케이 신호를 받은 아카이가 힘주어 차체를 밀었다. 차가 둥실거리며 우주 공간 속으로 넘어갔다. 고속도로에서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확인한 그가 다시 신호등을 쑤석거리더니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좀 더 멀어지면 폭파하겠습니다. 미는 중에 터질까봐 냉각시키긴 했지만 그편이 처리가 깔끔하겠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아카이가 주머니에서 칼로리 밸런스를 꺼내 내밀었다. 아무로가 하나 받아들고 우물우물 씹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아 들키지 않고 처리한 건 잘된 일이지만, 반대로 이 도로를 벗어나기 위해서 누군가 지나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
되든 안 되든 해 보는 수밖에. 7시간 만에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발견한 아무로가 여행가방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턱, 박력 있는 소리에 아카이가 의아해 하는데 그가 머리를 한 쪽으로 쓸어 올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적어도 척추형 외계인이길 빌라구요, 아카이.”
대충 척추형 지적 생명체의 경우에 그의 외모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긴 할 터였다. 그러나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리는 제스처와 말의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아카이가 뭐라 질문을 하기 전에, 노란 스페이스카가 그 앞에 섰다.
“오빠 지구에서 왔어요?”
“그냥 배운 거예요. 괜찮으면 가까운 도시까지만 얻어 타도 될까요?”
“좋아요. 저희도 가까운 데서 음료 좀 보충하려던 참이니까.”
“그리고 죄송하지만 저 남자도 타야 하는데.”
아무로가 뒤에 있는 아카이를 가리켰다. 앞 좌석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은 화통하게 웃음을 터트리곤 '좋아요!' 외쳤다.
“지구인이 아니면, 그 히치하이킹 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예전 직장동료가 지구인이었거든요. 아주 밉살맞은 남자였죠.”
기꺼이 동승을 허락해준 두 여성은 다행히 척추형 동물에 직립보행형 지적 인류였다. 피부가 오렌지 빛깔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지구인과 거의 흡사했다. 아카이가 보기에는 그랬다. 밉살맞은 예전 직장동료는 아주 초창기 지구인들이-스페이스카를 직접 생산하지 못해 우주여행이 힘들었다- 패기와 열정만으로 우주여행을 한 시기에 유행했던 문화를 기억해냈다. 지구인이지만 모행성에서 지낸 시기가 짧은 아카이로선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무로는 겉으로 보기에 지구인으로 보였다. 스스로 몇 번이나 부정했으나 지구 거주 경험은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그의 정체를 가늠해 보았다. 쓸데없는 일이었지만 재잘대는 수다에 맞출 수가 없었다. 뭔가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이쪽에는 뭐 하러 왔어요?”
“무로흐르비비-6 성단 대 폭발을 구경하러요.”
“세상에! 블랙홀 주의보가 온 우주에 다 방송됐는데 갔단 말이에요?”
“음, 위험해도 꼭 보고 싶었거든요. 결혼기념일이라.”
“대단한 커플이군요!”
“덕분에 차가 다 망가져서 보험회사에서 끌고 갔지만요. 여러분은요?”
“저희는 항성 찍기 하는 중이에요. 고속도로로 은하에서 다음 은하까지 가 보는 거죠.”
이제 아카이와 아무로는 유별난 커플이 되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도 않는 고속도로에 덩그러니 있었던 이유를 어떻게 둘러댄 아무로가 슬쩍 아카이의 어깨에 기댔다. 대단한 연기였다. 어쨌든 그가 옳았다. 무로흐르비비-6 성단 내 별에서 A급 위험 기생생물을 멸종시키고 블랙홀의 발생 시기에 맞춰 폭파한 후 증거 인멸을 하고 당신네 차에 얻어 탔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 생물은 고등 생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원시인류로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있었다. 신종인류로 인정되면 외부 간접을 차단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까지 자연 진화하도록 한다. 그러나 아무로가 소속된 기관에서는 그 위험성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제거하길 원했다.
연기에 맞추는 척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좀 자도록 해, 충고했다. 아무로는 그 과정에서 정신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비했다. 아카이도 거들기는 했으나 그의 임무였고, 거의 그 혼자 해결했다. 타인이 셋이나 있는 좁은 차 안에서 잘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아카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눈이라도 감고 쉬기로 했다. 아무로가 머리에서 힘을 빼자 아카이가 고개를 고쳐 잡아 주었다.
“성단 대폭발은 어땠어요? 위험한 만큼 아름답던가요?”
“글쎄…,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차가 다 망가질 정도의 고생을 감내하고 보러 갔는데?”
“솔직히 별로 관심 없었습니다.”
아카이가 무례하게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말했다. 앞의 두 사람은, 운전을 하던 사람마저도 뒤돌아 아카이를 놀라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럼 그 위험한 델 왜 갔어요?”
“그가 가고 싶어 했으니까.”
“와-!”
두 여성이 감탄을 터트렸다. 핸들에서 손을 뗐지만 그들의 노란 스페이스카는 최신형이었으므로, AI가 알아서 자동 운전 모드로 전환해 안전하고 신속하게 네 사람을 다음 도시까지 실어 날랐다. 감탄사 사이로 아무로가 아카이의 허벅지 안쪽을 꼬집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그들은 도시 초입에서 친절한 여행자들과 헤어졌다. 노란 차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아무로가 날을 세웠다. 아카이는 밟힐 뻔한 발을 재빠르게 빼내고 그의 뒤로 돌아 들어갔다.
“왜 화가 났지?”
“당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잖습니까!”
“내가? 먼저 부부인 척 한 건 자네잖나. 게다가 난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어. 네가 가자면, 나는 가는 수밖에 없어.”
“그건, 그렇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뭐라도 먹고, 숙소를 구하자고.”
“연락이 우선입니다.”
한풀 꺾인 아무로가 표정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한 상태로 주머니에서 위성 전화를 꺼냈다. 전원을 몇 번 누르더니 젠장, 욕을 씹어냈다.
“자기폭풍에 망가졌을 걸.”
“아카이 슈이치이이.”
“내 탓이 아냐. 저 식당이 괜찮겠군.”
아카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아무로를 질질 끌다시피 해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제대로 된 인프라에 어울리지 않게 신이 나서 테라스 석에 앉았다.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그 자리를 고른 것을 아카이 슈이치는 뼈가 시리게 후회했다.
***
데친 우주 촉수를 구황작물과 버무린 새콤한 샐러드와 붉은 바다산 해산물 샌드위치가 테이블 가득 올라왔다. 샌드위치의 폭신한 감촉을 즐기며 겨우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였다. 아무로가 아카이, 불길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작은 아이가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실종된 바론 남작의 아들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데. 저 종족은 연령조정을 못 해.”
부정하면서, 먹던 샌드위치를 입안에 마구 구겨 넣었다. 지갑에서 적당한 팁을 포함한 지폐를 꺼내 접시 아래에 끼웠다. 소년을 계속 주시하던 아무로가 그런 아카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짐을 순식간에 챙겨 들고 일어났다.
“확인해봐야겠습니다.”
“그래.”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아카이를 그가 흘끗 보고 테라스를 순식간에 뛰어 넘었다. 그 뒤를 따르면서 아카이가 한숨을 쉬었다.
작은 소년은 입간판과 체격이 큰 사람들 틈에 숨어 재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쫓기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쫓는 듯했다. 나아가는 방향으로 보건데 중앙 항공 터미널이 유력한 목적지였다. 그가 쿠도 신이치가 맞고, 가출했다면 들키지 않게 계속 별을 옮겨 다닐 터였다.
사거리에서 두리번거리던 소년이 결연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횡단보도 신호가 이미 깜빡이고 있었다. 타겟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타겟은 아마도 검은 양복은 입은 저 남자. 소년이 튀어 나가려는 순간, 아무로가 그를 잡아챘다. 신호가 바뀌고, 스페이스카들이 일제히 도로를 달렸다.
“젠장!”
소년이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제법 숙련된 어조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소년을 품에 안은 채로, 아무로와 아카이가 눈빛을 교환했다. 그가 바론 남작의 아들 쿠도 신이치이든 아니든, 그는 외견과 다른 정체를 숨기고 있고,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수상한 인물이라는 판단을 공유했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아이스 커피를 쪽쪽 빨면서 소년이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모르는 사람한테 알려주면 안 된다고 그랬어. 형아는 누구야?”
큰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말에 아무로가 웃음으로 답 해주었다. 그 웃음에 한기를 느끼고 아카이가 팔을 문질렀다. 가면 같은 친절한 웃음과 상냥한 어조를 유지한 채 이어지는 것은 신랄한 비판이었다.
“연기가 서투르네요. 횡단보도에서 잡혔을 때 울어버렸어야 했습니다. 따라오지도 말아야 했고.”
“그렇지만 차에 부딪힐까봐 도와준 착한 형인걸?”
그가 양손에 턱을 받치고 빙그레 웃고만 있자 우물우물 어린애답게 칭얼대기까지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그런가요. 보호자는 어디에 있죠? 같이 경찰서에 가도록 해요. 바론 남작의 아드님.”
소년이 탁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 눈에는 방금 같은 순수한 빛은 없이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었다. 그러나 탐색하듯 끈질기게 아무로와 아카이의 피부를 긁었다.
“저를 죽일 건가요?”
후루야도 웃음을 거뒀다. 아무래도 단순한 가출이 아닌가 보았다.
바론 남작, 전 우주적인 미스터리 작가 쿠도 유사쿠가 아들의 실종신고를 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들은 탐정으로 자주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지만 연락은 꼭 주는 아이였는데 얼마 전부터 전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설마 4차원 미아가 됐을까 염려하며 신고를 접수했을 때가 이미 석 달 전이었다.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은하를 벗어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목격 정보가 얼마 없을 만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왔다니.
“아무로 씨는 뭐 하는 사람?”
소년은 본인이 쿠도 신이치라고 확답하지는 않았으나 설명에 눈에 띄게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작은 아기 새처럼 높은 목소리도 어눌한 말투도 그만두었다.
“탐정입니다. 쿠도 유사쿠 씨에게 직접 의뢰를 받은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경찰 관계자니까 모른 척할 수 없었어요.”
소년이 다 녹은 얼음을 빨대로 휘저었다. 엉망으로 지저분하게 섞인 층들이 그의 머릿속 같았다. 달그락달그락 얼음이 내는 소리가 심정을 대변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 가만히 소년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의미 없는 시간 끌기라고 생각한 아카이가 입을 열었다.
“작아진 것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당황스럽겠지만 종종 있는 사고니까.”
우주 수송 안전에 관한 코스모스 협약에 의해서 게이트 통과에 의한 4차원적 사고, 물리적 정신적 피해에는 가능한 모든 보상이 뒤따랐다. 이전에는 막대한 보상금 지급 뿐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다행히 협력체에 소속된 연구소에서 치료 또는 회복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팔이 하나 사라지거나 육체만 전송되는 경우에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과학자와 우주 경찰들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게이트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불법 실험이나, 외계 생물과의 접촉일 경우였다. 후자라면 아무로 토오루의 전공 분야였다. 그러나 소년이 말했던 ‘죽일 건가요’가 무척 심상치 않았다. 누군가 그를 죽이려고 했고, 어떠한 접촉이나 약물 때문에 작아지게 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거라면.
“지금 모습 그대로라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 혼자인 편이 훨씬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지?”
작아진 모습이래 봐야, 쿠도 신이치도 17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었다. 아무로는 사무적인 높임말을 그만두고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별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니.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 있었다.
소년은 종전보다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강한 눈이었다.
“내 의견은 같아. 집으로, 적어도 살던 곳으로 돌아가.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서라도.”
그를 죽이려던 누군가가 이미 그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고, 자신이 돌아가는 것이 주변에 위험을 초래한다면 소년의 말대로 쿠도 신이치가 작아진 채, 그러니까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며, 돌아가는 것보다 그편이 안전했다. 소수의 인물에게만 정체를 밝히고서 도움을 받는 편이 좋았다.
“이 별의 항공 터미널 통관은 엄청 꼼꼼하고 엄격해요.”
아시겠지만요. 납득했지만 방법이 없으니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비딱하게 턱을 괴고 투덜대는 투가 딱 제 나이다워 아무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카이, 아는 업자는?”
“이 주위엔 없어.”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아는 쪽에 가죠. 덧붙여서, 그 사람 정말 까다롭고 예민하고 성가시니까. 당신 한마디도 하지 마.”
그가 누군가를 까다롭다고 표현하는 일은 드물었다. 본인이 무척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아카이는 몇 번이나 알았다는 대답을 하며 수상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허름한 건물 뒷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그가 익숙하게 앞장섰다. 아카이는 작은 소년을 한 팔로 안아 들었다. 떨떠름한 표정에 대고 꽉 잡으라 하니, 소년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는 층을 하나 내려가자 얼굴을 바꿨다. 아무로가 아무렇게 늘어선 노점상에서 로브를 하나 사 두 사람에게 덮어씌웠다. 답답할 텐데, 소년은 말없이 아카이에게 바짝 붙었다. 검은 머리를 한 직립보행형 척추인류는 둘 뿐이었다.
계단은 층마다 다른 곳에 있었다. 얽히고설킨 미로를 아무로가 능숙하게 헤쳐 나갔다. 나는 듯한 빠른 걸음으로 여섯 층 정도 내려갔을까, 인종의 도가니탕 같던 곳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폭탄으로도 뚫기 힘들어 보이는 굳건한 회색 문 앞에 전에 없던 보초가 서 있었다. 아무로가 명함을 내밀었다. 그 얇은 금속판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곤, 문을 열었다. 온통 회색으로 기계와 정비소들이 질서정연하게 구역을 나눠 즐비하게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것이라곤 안드로이드와 개조인간들 몇뿐 황량했다. 아카이가 로브 모자를 벗었다. 소년이 그 사이로 후, 갑갑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로가 다가와 조금 땀에 젖은 그 얼굴을 걷어주자, 소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카이가 보기에도 아주 어린 아이에게나 취할법한 행동이었다. 예상보다 그의 나이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십대가 아주 아기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아카이, 지겹겠지만….”
“그래. 입도 벙긋 안 해.”
“아니, 꼼짝도 말아요. 가능하면 숨도 쉬지 마.”
뭐라고? 그가 무리한 당부를 하고 정비소로 들어갔다.
“어머, 어쩐 일이야? 버번.”
아무로가 말한 업자는 노란색 눈을 세로로 깜빡거리며 온몸의 비늘을 바짝 세웠다.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호의적이지조차 않았다. 한 번 눈길만 주고 데스크 위에 작업하던 설비를 계속 만지는 그에게 아무로가 천천히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에이미.”
그 부드러운 음성에 그의 비늘 각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쳐진 눈에 아까와 달리 내려간 눈썹이 무척이나 그럴 듯해 소년은 ‘우와아, 미남 치사하다’ 따위의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에이미는 코웃음을 쳤다.
“꺼져. 지구인 따윈 상대 안 해.”
그가 얇은 혀를 빠르게 낼름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아무로를 보지 않고 애꿎은 기계를 신경질적으로 내려쳤다. 아무로가 몸을 낮춰 앉았다. 그의 반응을 보며 천천히 의자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부러 고개를 돌려 마주 보려 하지 않는 에이미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이 별의 토착 언어로, 우주 공용어와 달랐다. 소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린애야, 에이미. 집으로 돌아가고 싶대.”
에이미가 기계에 고정한 시선을 휙 소년에게로 돌렸다. 노란 눈이 뚫어질 듯 노려보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자 그가 혀를 느긋하게 날름거렸다. 비늘은 얌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좋아. 날 보고 소리 지르지 않은 지구 꼬마는 처음이네. 이름은?”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소년의 몸이 긴장하는 게 아카이에게도 느껴졌다. 소년은 부끄러운 척 눈을 굴리며 시간을 벌었다. 에이미의 작업대 너머 거대한 서재를 보고 떠오른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코난. 에도가와 코난이야! 누나는?”
“에이미 문. 알려 줬다고 부르지는 마.”
에이미가 내준 작은 의자에 앉아서 코난이 어린애답게 발을 흔들었다. 사진을 찍은 에이미는 아무로와 함께 서재 뒤편으로 들어갔다. 정말 그거 어디 있는지 아는 거지 따위의 말을 하며 연신 혀를 날름댔다. 피부 온도의 변화나 냄새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려는 반응이었다.
서재에는 지구 공영어로 된 서적이 몇 권 있었다. 문은 어느 별에서나 쓰는 흔한 성이었지만 지구에서야말로 나라에 상관없이 무척 많이 쓰이는 성이었다. 지구에는, 아직도 지구인들이 95퍼센트 이상 산다. 지구인의 외행성 이주는 활발하지만, 지구로 이주하려는 외계인은 거의 없다. 그가 지구인을 혐오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 된답니다.”
혼자 나온 아무로가 코난을 안아 들어 아카이에게 넘겼다. 망토 속에 소년을 숨기고 내려올 때보다 더 빠르게 지하를 벗어났다.
숙소는 번화가도, 그렇다고 지하세계에서 가까운 곳도 아닌 어중간한 곳으로 신경 써 골랐다. 치안이 너무 나쁘지 않으면서 최신식 방범도 아니라 조금 고장 나거나 데이터에 누락이 있어도 가끔 그랬지 싶은, 약간 낡았지만 깨끗한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두 분 정말 정체가 뭐예요?”
“말해줄 거라 생각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래요.”
코난이 심드렁하게 안경을 닦았다. 욕실로 가 이 자리에 없는 아무로에게도 이미 물어보고, 탐정이라고 했잖니, 의미 없는 대답을 들은 후였다.
“너야말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왜 쫓아갔지?”
“대답할 거라고 생각 안 하죠?”
아카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보던 신문을 계속 읽었다.
부부와 그 아이인 척 했기에, 침대는 넓었지만 두 개였다. 소파에서 자겠다는 소년을 부드럽게 들어 아무로가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카이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매만지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어둠을 채웠다.
우주에서는 자지 않고 먹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단다. 자장가처럼 아무로가 속삭였다. 그 말대로였다. 쉬지 않고 날을 세워보았자 손해였다. 긴장은 체력을 깎아 먹었다.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뺐다. 아무로의 키와 단련된 몸에 비해 둘린 팔이 이상할 정도로 가볍고 편안했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지구인이 아닌가 보았다. 그의 품은 바다 같았다. 모래가 파도에 밀려나는 소리, 바다 거품이 땅속으로 빨려드는 장면, 언제 스며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리운 감각의 파도에 잠겨서 깊은 동굴로 정신을 떨어트렸다.
눈꺼풀의 간지러움에 눈을 뜨자 희미하게 밝은 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두 어른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자는 편이 아닌데, 일어났니 하는 인사에 민망해져 세면장으로 들어가 번개처럼 빠르게 씻었다. 옷까지 갈아입고 나가자, 테이블 위에 여권과 사이에 끼인 항공 티켓이 보였다. 코난이 자는 사이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로가 넘겨준 데이터와 여권 정보를 빠짐없이 암기하고서 데이터는 파기했다.
“금방 외우는구나, 꼬마야.”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코난이 툴툴거렸다. 훗, 아무로가 웃음을 흘렸다 그 킥킥대는 소리에 아카이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암녹색 눈알은 강렬한 물음을 담고 있었다.
“그럴 때지요. 당신은 달랐습니까?”
아, 이해한 아카이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아니었지 대답했다. 점잖게 놀림당한 코난은 화내지도 못하고 못 들은 척 여권이나 살폈다.
“이거 정말 진짜 같은데요.”
아무로가 방긋 웃으며 비행시간과 주의할 점을 일러주었다. 정말 정교한 위조였다. 재질과 홀로그램은 같다 해도 좋았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여권이 아니라, 여권 제작 장비를 통째로 복제하는 수준의 기술력이었다.
어떻게 출국 통과는 되겠지만 정확하게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이름과 매치되는 데이터가 아닐 텐데, 두 사람 다 여유로웠다. 이 정도쯤이야 익숙하다는 듯이. 입국할 즈음에는 불법 입국자로 잡혀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일까.
***
잔뜩 긴장한 어깨를 보듬어주는 손을 잡고 긴 출국심사 행렬에 섰다. 사람이 적은 새벽 비행기를 탔는데도 발달한 도시의 항공 터미널은 제법 붐볐다. 7살 전후 되는 작은 몸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아무로가 차라리 안아 들려는 것을 코난이 거부했다.
“코난이에요! 일곱 살!”
제발요, 좀. 어린아이 취급에 질려 하던 얼굴이 어린애답게 반짝반짝 빛났다. 출국심사 직원에게 자랑스레 손가락을 펴 보여주기까지 했다.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아카이의 호오하는 감탄에 소년이 귀를 붉혔다. 뒤이어 아무로와 아카이도 별 탈 없이 심사대를 통과했다. 그만 놀려요. 아무로가 소곤소곤 아카이에게 주의 주었다. 그는 순수하게 감탄한 거야,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어쩐지 어릴 때 러브러브한 부모님 사이에 끼어서 여행한 기억이 떠올랐다. 저 두 사람 정말 부부가 아닌가? 코난은 고뇌하며 멋쩍음을 털어냈다.
“배고프지 않니? 탑승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 뭐라도 먹자, 코난.”
“응!”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잠들기 직전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약간의 소지품만을 가지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여행자 둘. 순식간에 짐을 꾸리는 익숙한 손과 군더더기 없는 동작은 떠나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의 것이었다. 경험자의 말은 들어서 나쁠 게 없었다.
“에메랄드 쿼사디아 2인분이랑 파란 올리브 파스타, 빛나는 나무 열매 샐러드 하나, 우는 소라 샐러드도 하나 주세요.”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코난은 뭐가 좋아?”
“슈퍼노바 마실래!”
점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언제나 붐비는 공항이라 웬만한 패스트푸드만큼이나 빨랐다. 에메랄드 쿼사디아를 뽀작뽀작 씹어 먹는데 베어 문 옆으로 속이 흘러내렸다. 어린아이의 힘없는 손이 어색했지만, 그보다 자연스럽게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아주는 아무로에게 당황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티슈로 닦고 다시 식사를 했다.
“아무로 씨!”
“떼끼. 아빠라고 해야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무척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놀린다는 건지….
“지금 재미있죠….”
미안, 미안. 사과하고 두 사람이 다시 조용히 식사하는 동안, 먼저 허기를 채운 아카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너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탑승구로 가는 도중 그가 입을 열었다.
“총은?”
“분해해서 화물로 대부분.”
“…그렇습니까.”
뭐냐고 물었지만 아카이는 턱을 매만지곤 애매하게 넘어갔다. 불길했다. 아카이 슈이치의 이런 아무 근거 없는 느낌은 50대 50으로 적중했다. 두 번 중 한 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손 머리 위에 올리고 전부 엎드려!”
“제기랄, 아카이.”
“내 탓이 아니야.”
조악한 플라스틱 레이저 총이 아니라 제대로 된 티타늄 합금 소재의 무기를 트롤형 외계인이 휘둘렸다. 한 번 발사하는 것만으로 기체를 자가수복 불가능 상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도킹 스테이션에서 있었던 짧은 대기가 이런 사태를 부를 줄이야. 확실히, 도킹 스테이션은 항공 터미널보다 출입 심사가 허술했다. 승객보다 화물이 많아 숨어들기도, 내리기도 쉬웠다.
아무로가 발목과 허리에 끼워놓았던 장비를 꺼내 재빨리 조립했다. 고개를 들자 아카이도 이미 총 한 자루를 들었다. 수신호를 교환하고 코난을 좌석 밑으로 숨겼다. 소년은 다음 도킹 스테이션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숨은 소년을 확인한 아카이가 복도로 튀어 나갔다. 한 번의 발포로 무기를 들고 있던 범인을 행동 불능으로 만들고 재빨리 품을 파고들어 무기를 빼앗았다. 이들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하이재킹은 익숙지 않아 보였으나, 무기는 능숙하게 다뤘다. 안전장치도 걸려 있었다. 정말로 쏠 때가 아니면 록을 해제해선 안 된다는 걸 아는 족속들이었다. 군인이거나 적어도 용병 나부랭이였다.
“이 새끼!”
“화내야 할 건 이쪽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오래 준비한 줄 알아? 선수를 치다니.”
아카이가 껄렁하게 무기를 어깨에 멨다. 박격포 같은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에 범인들이 동요했다. 아카이가 쏜 총은 화약이 터지는 단순하고 오래된 기술을 이용한 물건이었지만 안전했다. 그들의 총은 최신식이지만 하나 같이 강력해 함부로 기내에서 쏘기 힘들었다. 아카이가 나머지 한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로 불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뚜껑을 닫는 소리가 선명하게 났다.
소형 레이저 건을 허리에 찬 녀석이 덤벼들었다. 제대로 꺼내보기도 전에 머리가 날아갔다. 그 옆도, 아카이의 뒤에 있던 녀석들도 차례로 전부. 아무로가 쏜 총알에 의해서였다.
그는 외계인의 몸을 뒤져 무전과 통신기를 챙기고 빠르게 무기를 분해하거나 박살냈다. 그 모습을 관망하다가, 작업이 끝날 때 즈음 아카이가 깊게 빨아들여 반 이상 태운 담배를 바닥에 뱉어 구둣발로 비벼 껐다.
“시작할까, 버번?”
“좋습니다. 조종실은 2층입니다.”
둘은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 갔다.